사명당 설화
화백거석
2012. 12. 27. 17:30
사명당 설화
사명당의 속명은 임응규로 본관은 풍천이고 자는 이환이다. 사명당은 그의 법호이고, 유정은 그의 법명이다. 경남 밀양에서 출생, 15세에 직지사로 출가하여 지주까지 지냈다. 뛰어난 지력을 가진 사명당은 출가한 지 3년 만에 승과에 급제했다.
48세 때 임란이 일어나자 서산대사 휴정과 합세하여 승병장으로 맹활약을 하였으며, 이에 관한 설화가 많이 있다. 사명당은 일본과 명나라 사이에서 탁월한 외교력을 발휘했다.
사명당은 전처 소생의 아들과 후처 소생의 아들이 있었다. 전처의 아들이 장가간 첫날 밤에 어느 자객에 의해 목이 잘려지자 신부는 누명을 벗고자 남북을 하고 집을 떠나서 범인 색출에 전념한다. 그러다가 범인이 바로 시집의 계보의 사주를 받은 하인임을 밝혀내고 이를 시아버지에게 알린다.
시아버지는 벽장에 숨겨둔 항아리 속에서 아들의 머리를 찾아내고 후처와 그의 아들을 모두 묶어 집과 함께 불태워 버린 뒤 재산을 노복에게 나눠주고 집을 떠난다.
이 설화는 『사명당전』에 실려 있으며 전주.안동.밀양 등 여러 지역에서 10여편이 채록되었다. 임진왜란 당시에 사명당의 활약상을 담은 설화는 주로 『임진록』에 실려있는데 구전설화로도 채록된 것이 많다.
사명당은 임란이 끝난 후에 일본에 강화사신으로가서 탁월한 외교력을 발휘한다.
舟中夜坐 주중야좌 달밤에 배를타고앉아서 : 도쿠가와이에야스(덕천가강)을 만나러 가는배
路徑嵐島下關東 노경남도하관동 남도를 지나 관동으로 내려가니
天水相連渺若空 천수상연묘약공 하늘과 물이 맞닿아 끝이 아득하구나.
獨依艙頭無夢寐 독의창두무몽매 홀로 뱃머리에 기대어 꿈도 잠도 없으니.
可憐孤影月明中 가련고영월명중 가련타. 달밤의 외로운 그림자여!
회담을 앞두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8만 병력을 이끌고 교토에 입성하면서 사명 일행을 후시미죠로 불러 이를 참관케 하여 은연 중에 위력을 과시하려고 한 적은 있지만 사명의 인품과 학식에 일본 승려나 관리들이 오히려 승복하고 감명을 받았다. 사명당이 가는 곳마다 일본 지식인들이 찾아와 사명당에게 너도나도 시`문을 청했다. 이 때 남긴 시문이 남아 있어 오늘 날 사명의 일본 발자취를 그나마 더듬을 수 있게 한다. 도쿠가와이에야스와 사명이 주고받은 선시가 전한다.
도쿠가와이에야스 (덕천가강:왜왕)
石上難生草 석상난생초 돌에는 풀이 나기 어렵고
房中難起雲 방중난기운 방안에는 구름이 일어나기 어렵거늘
汝爾何山鳥 여이하산조 너는 도대체 어느 산에 사는 새이기에
來參鳳凰群 내삼봉황군 여기 봉황의 무리 속에 끼어 들었는가.
사명당 (조선 강화 사신)
我本靑山鶴 아본청산학 나는 본래 청산에 노니는 학인데
常遊五色雲 상유오색운 항상 오색 구름을 타고 놀다가
一朝雲霧盡 일조운무진 하루 아침에 오색구름이 사라지는 바람에
誤落野鷄群 오락야계군 잘못하여 닭 무리 속에 떨어졌노라.
이 비범한 분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존중하며 대화를 하는데,“대사께서 과거의 원한을 풀어 버리시고 양국의 인호를 약속해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자 사명당이 단호히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임진 정유 양차 침범에 우리나라 백성이 죽은 자 21만 8천 7백21 명이요, 행방불명이 4만7천 9백39 명이요, 병신된 자가 3만 6천 8백75 명이요, 재산은 궁정 소실, 가옥 분탕, 도둑맞은 역대 보물, 사찰 소화 파괴, 귀중한 소적 소실 유실 등은 그것이 얼마치나 되는지 그대들이 더 잘 알 것이다. 그것에 대한 대가를 배상하여야 할 것이 아닌가.” 이런 식으로 사명당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논박하며 대담에 성공해 다음해 4월에 많은 보물과 포로 3천7백 명을 싣고 귀국한다. 이것이 역사에서 말하는 ‘조일 강화담판’이다.
사명당은 왜왕이 왜국의 시(18000구)를 병풍에 적어 지나는 길에 진열해 놓고 자국의 문물이 번성함을 자랑하자 이를 모두 암송해서 모작이라 했다는 것이다. 왜왕은 사명당을 큰 무쇠막에 넣고 숯불을 피워 무쇠막을 달구어 데어죽게 하였으나 사명당은 ‘빙(氷)’자를 천장에 써붙이고 도술을 부려 왜왕이 방문을 열자 수염과 눈썹에 고드름이 얼어 붙어 있었다는 이야기(사초방)도 있다.
또 왜왕은 무쇠막을 벌겋게 달구어 놓고 이것을 타보라고 사명당에게 요구하자 사명당이 도술을 부려 사해용왕을 불러 비를 오게 해서 무쇠막을 식히고 비가 계속 쏟아져 왜국을 물바다로 만들었고, 비를 그치게 해달라며 애걸하는 왜왕(도꾸카와에이야스)에게
부자지국의 항복을 받고 매년 인피 300장과 부랄 서말씩을 조공하도록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연못에서는 구리 방석을 타고 다녔다고 한다. 이러한 설화는 모두 '임진록'에 기록되어 있는데, 임진왜란시에 형성된 왜적에 대한 민족적 적개심과 민족적 긍지를 반영하고 있다.
사명당은 임진왜란의 막바지에서 일본에 건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평화협상을 성공적으로 해내고 일본에 끌려갔던 포로 1천900명을 데리고 돌아온 일로 잘 알려져 있다.
경남 밀양군 무안면에 표충비가 있는데 이 비는 국가의 큰 일이 일어날 때마다 몇말씩의 땀을 흘린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사명대사는 고국으로 돌아와 비변사에 일본에서 있었던 일을 보고한다. 임금 선조는 그의 노고를 치하하고, 최고급 비단으로 만든 금란가사 한 벌 등도 하사한다. 이 유품은 현재 밀양 표충사에서 보관하고 있다. 사명당은 스승인 서산대사의 입적 소식을 듣고도 어명을 받고 갑작스럽게 쓰시마로 가는 바람에 문상을 하지 못했다.
사명은 묘향산 보현사를 찾아 뒤늦은 조문을 하고 이듬해 1월 서선대사의 대상까지 치른다. 65세가 되던 해인 1608년에는 선조가 승하한다.
사명당에게도 병마가 침입해 그를 괴롭힌다. 그는 가야산 해인사 홍제암에 내려와 초막을 짓고 수행에 들었다. 1610년 8월 26일 67세의 나이로 입적한다. 법랍 54세였다. 지금부터 402년 전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1600년 도요토미를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도쿠가와는 조선과 화친을 요구했다. 이에 답하는 형태로 조선 조정은 임진왜란 후 6년 만에 사명을 파견한다.
조선이 단독으로 일본과 교섭을 하는 것이 명나라에 알려지면 큰 정치문제가 되기 때문에 사명은 국서도 갖지 않고 관직도 없이 비공식 외교사절로 파견되었다.
일본에서 사명의 활약에 힘입어 조선은 우월적 입장에서 국교를 회복할 수 있었다. 사명은 탁월한 외교력으로 일본과의 국교 회복을 위한 정지 작업을 한 것이다. 그가 없었다면 그 후 한.일 간의 평화는 이루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가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재평가 받는 이유이다.
사명 귀국 후 조선 조정은 일본에게 사죄의 뜻을 담은 국서를 보낼 것을 요구하는 강화조건을 마련해 대마 도주를 통해 일본 막부로 보낸다. 일본이 조선의 요구 조건을 받아들임으로써 1607년(선조 40년)에 여우길을 대표로 하는 사절단을 파견한다.
처음 사절단 명칭은 통신사가 아닌 '회답 겸 쇄환사'였다. 이는 사명이 도일하여 국교 교섭과 포로 송환에 이어 정식으로 다시 도쿠가와의 서신이 온 데 대한 회답과 함께 추가 포로 송환이 사절단의 중요한 임무였기 때문이다.
여우길 일행은 귀국 길에 조선인 포로 1천418명을 데리고 돌아왔지만 10년 뒤인 2차 통신사 (1617년) 파견에서는 321명밖에 데려오지 않았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억울하게 끌려 간 모든 조선인 포로 송환이 사명의 염원이었으나 이미 가정을 꾸리는 등 여러 가지 인연들이 얽혀있을 뿐 아니라 시간이 지남에 따라 포로들도 어느 정도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됐다.
또 돌아온다고 해도 예전의 삶을 살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 등이 겹쳐 포로 송환 문제는 점차 시들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남겨진 조선의 도공`선비 등이 일본 에도문화를 꽃피우는 토양이 되었다. (참조:naver 지식-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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